김동률 〈여름의 끝자락〉, 어느 여름을 지나고 있는 사진가의 기록
빨리 걷지 않아도 시간은 흐르고, 느려진 걸음에도 저마다의 시간이 있습니다.
빛을 기다리는 일에는 익숙하면서, 정작 내 삶의 속도를 기다리는 일에는 서툴렀던 사람이 있습니다.
김동률의 〈여름의 끝자락〉을 들으며, 그 서툰 기다림을 다시 배웁니다.
오늘은 이 노래를, 삼각대 앞에서 수없이 빛을 기다려온 사진가의 걸음으로 들어보려 합니다.
마음보다 먼저 느려진 걸음
나는 오랫동안 빠르게 살아왔습니다.
사진을 찍고, 사람을 만나고, 무언가를 만들고, 하나를 끝내기도 전에 다음 일을 생각했습니다.
어딘가에 가야 했고, 찍어야 했고,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특별히 힘들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움직이고 있을 때 내가 제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마음의 속도와 몸의 속도가 달라졌습니다.
마음은 이미 다음 장소를 생각하고 있는데 몸은 아직 오늘에 머물러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피로가 오래 남기도 하고, 무엇인가 시작하려다가도 잠시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내가 낯설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느려졌을까.
언제쯤 예전의 속도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묻게 됩니다.
꼭 예전의 속도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일까.
느려진 시간에도 보이는 것이 있다
사진을 오래 찍다 보면 기다림에 익숙해집니다.
빛이 오기를 기다리고, 구름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바람이 멎기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삶에서는 기다리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사진 앞에서는 몇 시간을 기다리면서도 내 삶에서는 언제나 빨리 결과를 보고 싶어 했습니다.
요즘은 그 모순을 생각합니다.
천천히 걷다 보니 전에는 별것 아니라고 지나쳤던 것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일.
창문을 열었을 때 들어오는 공기.
천천히 식사를 하는 시간.
별다른 목적 없이 잠시 걷는 일.
좋아하는 음악 한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듣는 일.
예전에는 하루라고 부르기에도 너무 평범했던 것들이 지금은 하루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하루가 반드시 비어 있는 하루는 아니었습니다.
아무 일 없이 저녁을 맞았다는 것.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괜찮은 하루가 있습니다.
빛이 물러난 뒤에야 드러나는 것
사진에서 강한 빛이 언제나 좋은 빛은 아닙니다.
한낮의 강렬한 빛이 모든 것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지만, 오히려 빛이 조금 물러나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림자가 길어지고 색의 온도가 낮아지는 시간.
하루가 끝나가는 그 짧은 순간에 풍경은 낮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줍니다.
사람의 시간도 그런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왕성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걸음이 느려진 뒤에야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가 얼마나 빨리 걸어왔는지.
무엇을 위해 그렇게 서둘렀는지.
그리고 그동안 무엇을 그냥 지나쳐버렸는지.
카메라를 들고 수없이 빛의 변화를 바라보았으면서 정작 나 자신의 시간에는 너무 무심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 일도 없는 하루의 가치
우리는 특별했던 날을 기억합니다.
먼 곳으로 떠났던 날.
마음에 드는 사진 한 장을 얻었던 날.
오랫동안 준비했던 일을 끝냈던 날.
누군가에게 인정받았던 날.
하지만 삶의 대부분은 그런 날과 날 사이에 있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날.
사진 한 장 찍지 않았던 날.
누구에게 보여줄 만한 이야기도 없었던 날.
예전의 나는 그런 날을 조금 아깝게 생각했습니다.
하루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것처럼 느끼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어쩌면 그날이 평온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않아도 하루는 하루입니다.
쉬었다면 쉰 만큼의 시간이 있었고, 천천히 걸었다면 그만큼의 풍경을 보았습니다.
요즘은 그런 하루도 기록해 둘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름은 하루아침에 끝나지 않는다
창밖에는 아직 여름이 남아 있습니다.
한낮의 햇살은 여전히 뜨겁고 매미 소리도 여전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저녁이 조금 빨리 찾아옵니다.
바람의 결도 미세하게 달라졌습니다.
계절은 그렇게 바뀌는 모양입니다.
어제까지 여름이었다가 오늘 갑자기 가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조금씩 자신의 온도를 내려놓습니다.
그래서 ‘여름의 끝자락’이라는 말이 좋습니다.
끝이라고 단정하지 않으면서도 이미 다음을 품고 있는 시간.
완전히 떠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처음의 뜨거움에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닌 시간.
지금의 나도 어쩌면 그 어디쯤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사진가에게 느린 시간은 무엇을 남기는가
사진가는 찰나를 기록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나는 사진을 오래 할수록 찰나보다 그 앞뒤의 시간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셔터를 누르는 시간은 아주 짧습니다.
그 한 장을 만나기까지의 시간은 훨씬 깁니다.
자리를 바라보고, 프레임을 정하고,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곳에 서 있습니다.
사진에는 찍히지 않지만, 어쩌면 그 시간이 사진을 만드는지도 모릅니다.
삶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무언가를 이루어낸 순간만이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시간까지 쌓여 결국 한 사람의 시간이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의 느린 걸음도 조금은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지금은 빨리 가야 할 시간이 아니라, 오래 바라보아야 할 시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 계절은 내가 재촉하지 않아도 온다
김동률의 〈여름의 끝자락〉이 끝나갑니다.
노래 한 곡이 끝났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한 계절을 지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다음 곡이 이어지기 전 잠깐의 정적이 찾아옵니다.
나는 재생을 멈춥니다.
노래가 지나간 자리에 남아 있는 고요를 조금 더 듣고 싶어서입니다.
창밖을 바라봅니다.
아직은 여름입니다.
그래서 굳이 서두르지 않으려 합니다.
예전의 속도로 빨리 돌아가려고 하지도 않고, 아직 오지 않은 다음 계절을 먼저 만나려고 하지도 않으려 합니다.
오늘은 오늘의 걸음만큼 가면 됩니다.
나는 멈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이전과는 조금 다른 걸음표로 걷고 있을 뿐입니다.
사진을 찍으며 수없이 계절이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때가 되면 빛은 달라지고, 바람은 방향을 바꾸고, 풍경은 스스로 다음 계절의 색을 입었습니다.
나의 시간도 그러할 것입니다.
김동률의 노래가 끝난 자리에서 한동안 그대로 앉아 있습니다.
창밖에는 아직 뜨거운 빛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빛 어딘가에는 이미 아주 조금,
다음 계절의 색이 섞이고 있습니다.
청춘(青春), 사진가가 듣는 지나간 빛의 노래
기술의 끝에서 사진가는 무엇을 보게 되는가